2020.03.26
박소원, 나를 울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

손톱들 단정하게 깎은 너의 손을 잡던 날

처음 사랑이라고, 맹세처럼 쓰고는

붉은 글자위에 잘 모르겠다고 휘갈겨 쓴 적이 있다


성북동 경사진 골목들 손을 잡고 오르내릴 때

측량사처럼 높은 담벼락에 금(禁)을 그으며

사랑의 깊이를 확인하는 나이를 통과할 때

나를 울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


따뜻한 손을 잡고 오름길 내림 길 경사진 길들

겁 없이 가로지르던 시절

사랑이 유일한 믿음이 되었을 때

독즙처럼 흐르는 것은 사랑에 지친 두려움이었다


샴쌍둥이처럼 맞붙은 몸이 되어

흘러넘치는 두려움을, 사랑을 어떻게 떼어낼까

더 깊이 걸어가면 돌이킬 수 없다고


이정표가 없는 길들, 도시의 골목 밖으로 꺼내었다

수량을 잴 수 없는 두려움을 사랑을

방류하고 방류하는 여백이 없는 일기위에

그래도 사랑이라고 쓴 뒤 잘 모르겠다고 휘갈겨 쓴다


실족한 두 발은 도시의 골목들 죄다 게워내지만

나무들 빽빽이 서 있는 숲 속을 해매일 때에도

단단한 어둠의 벽에 금을 긋고 돌아설 때에도

서럽게 나를 울리는 사람은 너밖에 없었다